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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리뷰

엠마뉘엘 레비나스 /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by 낭만리뷰어 2021. 12. 29.

상처와 고통 

사유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상처와 고통을 겪을 때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문제가 되고 사유거리가 되는 것은 독서를 통해서이다. 욕망은 현실의 염려라는 벌레에 갉아 먹히기 십상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책들을 읽으면서 욕망은 그 생명력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고 구체화될 길을 찾아나갈 수 있다. (레비나스가 우리를 철학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한 대략의 안내도)

 

레비나스 본인의 유대인으로서의 상처와 고통이 외려 레비나스의 철학적 힘이 발휘되는 곳이었다. 이와 같은 특수한 조건 속에서 레비나스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을 간파하려고 했다. 우리 모두는 유대인처럼 자기 ‘존재에 매인 붙박이’이다. 자기 존재에 얽매여 있다 함은, 지금의 자기가 서 있는 삶의 터전을 그렇게 만들어 온 역사 속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는 모두 존재라는 벽에 갇혀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에서 비롯되는 존재의 고통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내 자유를 제한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반면, 레비나스는 내 자유가 설령 무한정 증대된다 할지라도 결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뿐만 아니라 서양 존재론 전통 자체의 밑바탕을 이루는 전제는 바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이다. 레비나스는 청년시절부터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이 점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20세기 초 각 존재자들(이 경우, 각 민족들)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레비나스는 그런 영웅적 투쟁의 부질없음을 드러내길 원했다. 하이데거가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열강의 입장에 선다면, 레비나스는 그런 전체주의적 폭력에 희생되는 개인의 편에 선다고 할 수 있다.(하이데거=자유의 관점 / 레비나스=정의의 관점)

 

‘존재에 매인 붙박이’

 나치 체제 속에 있는 한 아무리 내가 유능해도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의 불안과 고통을 전혀 덜어주지 못한다. 이것을 보편적인 의미를 띤 사태로 번역하면, 아무리 내가 더 많은 가능성을 지녀도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의 고통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불만의 궁극적 뿌리는 인생의 여러 가지 제약들이 아니라 내가 나라는 존재로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출구가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근본 바람은 더 나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초월의 욕구가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고 하는 초탈의 욕구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한 무한 타자를 향한 자기 초탈의 욕망(인간의 근본 욕망/무한 타자는 대타자?) 자기 강화를 위한 초월의 충동(세속적 초월의 욕구/ 상징계안의 욕망 같은...출세욕 등등...)으로 변질시킨 채 살아간다.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론적 분리 

구토, 부끄러움, 게으름, 권태 등의 존재론적 현상들은 모두가 위에서 살펴본 도피 욕구의 발로이다. 이 모두가 존재에 감금되어 있다는 고통이 발현되는 현상들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내던져진 존재자에게 이 존재의 운명을 적극 인수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레비나스는 그런 운명을 강제하는 존재에 대해 존재자가 근본적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주체성의 이념을 거부하고, 존재자를 존재에 예속시키는 존재론적 차이를 역설하고,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를 독립시키고 개별 존재자의 주체성과 내면성을 옹호하는 존재론적 분리를 내세운 것이다.

 

‘비본래적 실존’은 인간이 우선 대개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과의 교류에 몰입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 책임을 방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존재 도피의 방식을 하이데거는 퇴락의 행태라 비판하며 어떤 긍정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레비나스에게도 이런 도피적 삶은 결국 지양되어야 하지만, 레비나스는 문제의 존재 도피 방식을 ‘향유’라고 부르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하이데거의 비본래적 실존이 누구나 우선 대개 택하는 길이듯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향유도 우리가 선호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인간은 존재의 위협에 맞서 존재를 정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존재 정복의 태도와 길을 통틀어 일컫기 위해 레비나스는 향유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때 향유는 세계를 먹을거리, 볼거리 등으로 즐긴다는 좁은 의미를 넘어서, 인식 등 동일자(주체)의 지배를 강화하는 모든 활동들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존재론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향유의 행복이 존재의 익명적인 횡포에 맞서 존재자가 자신의 개체성, 단독성, 독립성, 자율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뿐만 아니라, 향유하는 감성이 없다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감수성도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개별자를 희생시키는 국가와 역사의 부정의함에 대해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저항할 수 있는 광기는 향유하는 감성과 동일한 실존 구조이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죽음과 사랑   

존재를 정복한 주체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거침없이 발휘할 수 있는 주권적 위치를 확보했지만, 세계--존재로서 육체를 가진 나는 언제나 이미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타인들 사이의 관계망에 사로 잡혀 있다. 이 때문에 나의 자유의지는 언제나 이미 타인들에 의해 소외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이런 소외와 예속 상태가 극에 달하는 상황이 바로 전쟁이다.  이렇게 익명적 존재에 희생되는 것은 비단 전시뿐만 아니라, 경제적 교환과 정치적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존재의 향유 운동 .... 전쟁 - 불안정한 평화(전리품의 향유) - 전쟁 - 불안정한 평화(전리품의 향유)

이러한 운동의 향유의 주체는? 그것은 특정 개인이나 민족이 아니고, 바로 익명적 존재 그 자체이다. 가령 자본주의에서 향유의 주체는 노동자도 자본가도 아닌 자본 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익명적 존재의 위협을 극복하고자 출범한 존재 정복 사업이 결국 익명적 존재 속으로 되삼켜지는 소외상태로 귀착하고 만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인간에게 이런 존재 집착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존재에 집착할지라도 타자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타자와의 관계는 오로지 타자를 더 잘 흡수하고 자신에게 더 잘 동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맺어진다.  

 

전쟁과 평화의 차이는 타자에 대한 욕망의 문제이다.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망은 자기 보존 충동이 아니라 자기를 초탈하여 타자로 나아가려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일단 주체에 의해 거부된다. 평온한 균형 상태에 우선 대개 머물고자 하는 주체에게 타자를 향한 욕망은 일단 놓여나고만 싶은 불쾌감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존재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주체는 자신의 평온한 균형 상태를 교란하는 타자의 출현에 대해 즉각 파괴적 생명력을 방출하거나(전쟁), 이를 참고 평화적 교류를 하더라도 작용 - 반작용이라는 상호성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쟁과 평화 사이의 차이와 반복을 만드는 존재 향유의 리듬은 이 관성적 충동과 욕망의 생명력 사이의 길항 작용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죽음과의 대면은 존재 물음이 가장 극한 상황에서 제기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 시련을 끝까지 인내하게 되면 기존의 자기 동일성의 근저에 있던 자기(존재론적 자기)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자기(윤리적 자기)가 드러나면서 폐색되어있던 자기 공간에 타자로 향하는 숨통이 트이게 된다. 이 때 존재의 중심을 더 이상 자아에 두지 않는 메시아적 자기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천거하는 삶의 궁극적 형태는 이러한 메시아적 자기희생에 있지 않다. 

 

어차피 죽음이 닥치면 거기에 삼켜지게 될 운명이기에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해야 한다. 거기에는 여성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미 유한성을 인도한 여성의 인도 아래 에로스의 밤을 보내면서 메시아적 주체는 자기를 버리게 된다. 사랑 속에서 자기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와 다른 자기 속에서 부활한다. 에로스의 밤을 통해 도래할 새로운 타자(아이)를 통한 부활이다. 출산을 통한 부성, 아버지 되기가 그것이다. 이로써 나는 본질적인 유한성을 성이라는 형태로 회한 없이 인수하게 된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부성은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범주이다. 출산적 부성은 나의 가능성에 고착되지 않고 타인의 가능성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핵심이 있다. 부성이란 후속 세대를 나의 미래처럼 생각하는 마음인 것이다.  

 

모성애와 부성 

레바나스의 모성애는 내가 보는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단 하나의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심지어 나를 고문하는 사람마저도. 이러한 대속적인 희생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사태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레비나스의 무의식은 의식의 잣대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마저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생명력의 약동인 것이다. 

이 무의식적 생명력의 구조를 레비나스는 ‘타자를-위한-일자’라고 규정한다. 무한 타자에 대한 욕망, 타인의 잘못까지도 내 책임으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이 바로 무의식의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이런 무한 책임을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레비나스는 인정한다. 다만 그런 사람도 극단적 수난의 궁지에 몰려 숨 막히는 자기 불안의 시련에 처하게 되면, 자신이 그때까지 짐작조차 못했던 모성적 생명력이 샘솟을 수 있는 무의식적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경증적 감성만으로는 기존의 세계 질서에 대해 사랑의 광기로 맞설 수 있을지언정, 이 질서를 바꾸어 정의로운 세상이 도래하도록 현실적인 변화를 꾀하기는 쉽지 않다. 정의를 창출할 수 있는 실질적 혁명을 위해서는 ‘모성’적 사랑에 ‘부성’적 지혜가 ‘짝’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모성애가 가장 예민한 감성적 바탕으로서 늘 깨어있으면서도 더 이상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부성애가 개입하여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성애의 개입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엄마와 아이의 2자 관계에 틈입하여 거기서 배제된 다른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중재자의 출현이다. 이로써 윤리에서 정치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운동이 바로 레비나스에 따른 실존 혁명의 동력이다.

 

레비나스는 인류 전체를 하나의 어머니와 하나의 아버지 아래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로 보고 있다. 정의로운 국가는 유일무이한 타인에 대한 무한 사랑(모성적 감상 능력)을 제삼자를 고려한 이성(부성적 지혜)을 통해 제한하여 실질적 정의를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삶의 운동으로부터 탄생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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