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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영화 '멋진 하루' / 찌질하지만 밉지 않은 '웬수'

by 낭만리뷰어 2021. 12. 18.

2008년/드라마/이윤기 감독

 

네이버 영화 제공

 

잘 잊혀 지지 않는 날이 있다반대로 아무리 생각해도 당최 기억이 안 나는 그런 날도 있다그러고 보면참 많은 날들이 서서히 우리 기억 속에서 그냥 사라진다. '멋진 하루'라고 제목을 쓰고 종이에 쭉 적어보지만생각만큼 잘 진행이 되지 않는다이렇게 불행하게 살았나아니면 내가 기억력이 좋지 않은 건가다른 사람들은 다른 걸까어떤 사람은 멋진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하니 콧방귀를 뀐다요즘 같은 시대에 그냥 별일 없으면 멋진 하루 아니냐고 반문을 한다하긴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를 가지고 나왔을 때묘하게 약 오르면서도 울림이 있었다그게 깜짝 놀랄만한 소리구나 하면서.

 

영화 <멋진 하루>의 영어 제목은 'My dear enemy'. 'dear'과 'enemy'의 조합은 이 영화의 여주인공 희수(전도연 역)가 바라보는 남주인공 병운(하정우 역)의 모습이다영화의 처음은 그냥 ''이다희수에게 병운은 1년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고자신에게 350만 원을 빌리고 나서 아직 갚지 않은 원수 같은 전 남자친구다경마장에 앉아 있는 병운을 찾고 나서는 빨리 돈을 갚으라고 하지만병운은 돈이 없다희수는 어쩔 수 없이 돈을 꾸러 다니는 병운과 함께 하루를 동행한다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희수의 말과 표정에는 더욱 짜증이 섞인다단발머리에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희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좀 다르게 돌아간다. 병운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병운의 편을 들어준다. 오히려 더 못 도와주는 것을 미안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희수를 비난하기도 한다. 꿈속에 격투기 선수 효도르가 나타나서 자신을 위로해줬는데, 한동안 정말 마음이 괜찮았다는 병운의 이야기에 희수는 갑자기 눈물이 터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가 처음에 경마장에 있었던 이유도 사실은 이룰 수 없었던 기수의 꿈을 달래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그 하루가 지나가면서 어느 순간 희수는 병운의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마치 미워할 수 없는 병운의 기운이 희수의 방어막을 조금씩 소멸시키는 것처럼.  

 

도대체 병운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친척 형은 사람들 앞에서 병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준 돈 사업하다가 다 날려먹고, 아직까지도 자기 아버지 걱정만 시켜드리는 철없는 놈, 심지어 결혼한 여자도 도망가게 만드는 답답한 녀석이라고. 그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들으면서도 그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중을 드는 병운은 마치 초현실적인 인물 같다. 도대체 병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돈 빌리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 

없으면 있는 사람한테 좀 빌리면 되는 거고, 생기면 갚고, 

내가 있으면 남 좀 도와주고, 그게 바로 사람 사는 맛이지"

(극 중 병운의 대사)

 

맞는 말이다. 그게 사람 사는 정이고 맛이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그저 앞 만 보고 달려야 한다. 주변 챙길 시간이 없다. 괜히 챙기다가 나까지 밟힐 지경이다.  그런 팍팍한 현실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어려운 일을 병운은 해낸 모양이다.

 

희수가 병운이를 내려주고 돌아가던 순간, 운전을 하는 희수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변화를 카메라앵글은 아주 천천히 담아서 보여준다. 그들의 하루가 끝날 무렵, 희수의 말투와 표정은 처음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졌다. 진짜 멋진 하루를 보낸 것처럼. 돈을 못 갚으면 실컷 욕이라도 해주려고 했다던 희수는 350만 원을 다 받을 수 있었지만, 결국 얼마를 남기고 차용증을 받는다. 영화의 마지막 두 컷에서, 냉장고에 붙어 있는 그 차용증과 병운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라고 얘기했던 막걸리바의 상호가 보인다.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 마지막 장면은 영화 내내 나른하면서도 따뜻하게 울리던 재즈음악과 함께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영화는 그들의 그 다음 하루를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하루가 한 사람에게 주는 작은 선물,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나 단단하게 붙잡고 있던 자신을 잠깐 느슨하게 해주는 멋진 일들을 풀어서 보여준다. 병운처럼 살면 어떤가. 또 희수처럼 살면 어떤가. 우리는 없는 정답에 매여서 풀이 과정만 계속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실패한 풀이과정만 계속 보면서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지도.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문득 내 표정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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