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럴리 경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 그는 영국에 담배를 처음 소개한 사람이지. 어느 날 여왕과 내기를 했어. 담배 연기의 무게를 재는 내기였지. 그건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어. 똑똑한 월터 경은 안 피운 담배를 먼저 저울에 올려놓고 쟀어. 그리고 피운 담뱃재를 세심하게 저울 위에 털었지. 다 피우고 나서 꽁초도 재와 함께 저울에 달고 그 무게를 처음에 재 놓은 안 피운 담배 무게에서 뺐지. 그 차이가 담배 연기 무게야.”
(영화의 첫 부분 ‘폴’의 대사)
금방 사라질 담배 연기의 무게를 정말 잴 수 있을까? 시간의 무게는? 방금도 시간은 흘러갔다. 담배 연기가 사라지듯 시간도 그렇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담배 연기가 베듯이 시간도 어딘가에는 베어서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간혹 지독한 것들은 아무리 씻어내도 그 냄새가 남아있다. 서서히 지워질 때까지 기다리던지, 버려야 한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전부 그런 지독한 시간들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소설가였던 폴(Paul)은 몇 년 전에 강도사고로 아내를 잃고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그가 항상 담배를 사기 위해 찾는 곳이 오기(Auggie)의 담뱃가게다. 오기는 매일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한 첫 사랑(루비)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런 어느 날 담배를 사고 나가던 폴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차에 치 일 번 한다. 이 때 그를 구해주는 흑인소년이 바로 라쉬드(Rashid). 라쉬드는 우연히 강도들이 떨어뜨린 돈을 줍게 되고 그들을 피해서 가출한 소년이다.
자신을 구해준 이 소년에게 폴은 며칠 동안 자신의 집에서 지낼 것을 제안하다. 결국 며칠 후 소년은 폴의 집을 찾아가 이틀을 지내고 다시 길거리로 나간다. 폴이 다시 글을 쓰게 되면서 라쉬드가 있는 것이 불편해졌기 때문. 부모님 없이 삼촌부부에게 자란 라쉬드는 친아버지를 찾아간다. 한쪽 팔에 의수를 달고 홀로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라쉬드의 친부인 사이러스(Cyrus)다. 이 영화는 이렇게 옴니버스 식으로 이 다섯 인물을 5막 형식으로 이끌고 간다. 1. Paul 폴 - 2. Rashid 라쉬드 - 3. Ruby 루비- 4. Cyrus 사이러스 -5. Auggie 오기, 이런 식으로 말이다.
#1 Paul
Slow down. my friend!
어느 날 밤 오기가 가게의 문을 닫을 무렵 폴이 담배를 사러 온다. 폴은 계산대 위에 놓여있던 카메라 한 대를 발견하고 누가 놓고 갔다고 생각한다. 오기는 자신의 카메라임을 밝히며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5분 정도지만 날마다 찍는다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체부처럼 말이야.” 폴은 오기의 집에 함께 가서 지금까지 작업한 사진들을 구경한다. 똑같은 앵글이 계속되는 사진들을 막 넘겨보던 폴에게 오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Slow down, my friend!"
오기는 천천히 봐야만 이 사진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같은 사진 같지만 실은 전부 다른 사진이라고. 밝은 날, 흐린 날, 평일, 주말, 다른 사람들이 담겨있다고. 다시 천천히 사진첩을 넘기던 폴은 그만 한 사진을 보고 놀라서 멈추고 만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아내의 모습이 그 사진에 찍힌 것. 폴은 서서히 흐느끼기 시작한다. 아내의 일상이 찍힌 사진 앞에서 그는 술과 담배로 참아 두었던 슬픔을 내보인다. 폴은 항상 아내의 사진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가 작업하는 장면을 담은 장면에서 아내의 얼굴이 크게 담겨 있는 앨범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 사라진 듯했던 시간의 연기는 정지된 일상의 스냅 사진 한 장으로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아내의 얼굴로 다 채워진 사진으로 불가능했던 이 놀라운 축복은 일상이라는 스토리를 담은 사진 한 장에서 그의 영혼에 임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는 다시 타자기를 두드린다. 변한 것은 없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2 Rashid / Cyrus
You are lying!
사이러스에게 과거의 진실은 한 쪽에 찬 흉한 의수와 같은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12년 전에 당한 잔인한 폭력에 의해서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죽게 만드는 처지가 되고, 그러한 사건을 기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팔이 잘리게 된다. 그 이후로 그는 잘린 팔을 덮은 의수를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나쁘고 바보 같고 이기적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운명이 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찾아온 라쉬드는 그 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아들이었고, 결국 어느 날 이들을 찾아온 폴과 오기를 통해서 이 사실은 진실로 밝혀진다. 사이러스는 현실을 부정하며 아들을 내어 친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뱉어내듯 외친다.
“You are lying!"
충격적인 고통을 겨우 이겨내고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어린 자식까지 둔 그에게 어느 날 친자식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은 그저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때로 진실의 시간은 이렇게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하고 싶다. 눈을 감고 싶고 귀를 막고 싶다. 진실을 찾는 것보다 그 위에 덮인 지금의 시간이 그나마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거짓말 같은 진실이 찾아올 때, 잠시 잊고 있던 시간의 무게가 다시 나를 누를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폴과 오기 그리고 사이러스와 그의 새 가족들 그리고 그 옆에서 어린 사이러스의 아들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는 라쉬드의 모습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그렇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며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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